고려사 하공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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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공진
고려사 > 列傳 卷第七 > 諸臣 > 하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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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공진
河拱辰, 晉州人, 成宗朝, 爲鴨江渡勾當使, 穆宗時, 除中郞將. 王寢疾, 拱辰與親從將軍庾方·中郞將卓思政等, 常直近殿門. 尋遷尙書左司郞中. 及康兆擧兵至, 拱辰遂與思政奔于兆. 拱辰嘗在東·西界, 擅發兵入東女眞部落, 見敗. 顯宗初, 坐流遠島, 尋召還復職.
未幾, 王避契丹南幸, 拱辰追謁于道, 奏曰, “契丹本以討賊爲名, 今已得康兆, 若遣使請和, 彼必班師.” 王筮得吉卦, 遂遣拱辰及高英起, 奉表狀往契丹營. 拱辰行至昌化縣, 以表狀授郞將張旻·別將丁悅, 先往契丹軍言曰, “國王固願來覲, 第懼兵威, 又因內難, 出避江南, 遣陪臣拱辰等, 陳告事由. 拱辰等亦惶懼, 不敢前來, 請速收兵.” 旻等未至, 契丹先鋒, 已至昌化. 拱辰等具陳前意, 契丹問, “國王安在?” 答曰, “今向江南, 不知所在.” 又問, “遠近?” 答曰, “江南太遠, 不知幾萬里.” 追兵乃還.
明年, 拱辰與英起, 至契丹營, 乞班師, 契丹主許之, 遂留拱辰等. 拱辰旣被留, 內圖還國, 外示忠勤, 契丹主甚加寵遇. 拱辰與英起密謀奏曰, “本國今已喪亡, 臣等願領兵, 點檢而來.” 契丹主許之. 尋聞王返國, 使英起居中京, 拱辰居燕京, 皆妻以良家女.
拱辰多市駿馬, 列置東路, 以爲歸計, 人告其謀. 契丹主鞫之, 拱辰具以實對, 且曰, “臣於本國, 不敢有二心. 罪當萬死, 不願生事大朝.” 契丹主義而原之, 諭令改節效忠, 拱辰辭益厲不遜, 遂殺之, 爭取心肝食之.
後王下敎錄功, 加其子則忠祿資. 文宗六年, 制曰, “左司郞中河拱辰, 在統和二十八年, 契丹兵入侵, 臨敵忘身, 掉三寸舌, 能却大兵, 可圖形閣上.” 超授其子則忠五品職. 尋又錄其功, 贈尙書工部侍郞.
색인어
이름河拱辰,成宗,穆宗,拱辰,庾方,卓思政,康兆,拱辰,思政,兆,拱辰,顯宗,拱辰,康兆,拱辰,高英起,拱辰,張旻,丁悅,拱辰,拱辰,旻,拱辰,拱辰,英起,拱辰,拱辰,拱辰,英起,英起,拱辰,拱辰,拱辰,拱辰,則忠,文宗,河拱辰,則忠
지명晉州,東,西界,昌化縣,江南,昌化,江南,江南,中京,燕京
관직鴨江渡勾當使,中郞將,親從將軍,中郞將,尙書左司郞中,郞將,別將,左司郞中,尙書工部侍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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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공진
하공진(河拱辰)은 진주(晋州) 사람으로, 성종(成宗) 때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으며, 목종(穆宗) 때에는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다. 왕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하공진은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중랑장 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침전의 문 가까이에서 당직을 섰다. 얼마 뒤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으로 옮겼다. 강조(康兆)가 거병하여 개경 근처로 다가오자, 하공진은 마침내 탁사정과 함께 강조에게로 도망하였다. 하공진은 일찍이 동·서계(東西界)에 있으면서 제멋대로 군대를 움직여 동여진(東女眞) 부락에 침입하였다가 패배하였다. 현종(顯宗) 초에 이 일로 죄를 받아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소환되어 복직되었다.
얼마 안 있어 왕이 거란을 피해 남쪽으로 파천할 때, 하공진은 뒤따라가다가 도중에 알현하여 아뢰어 말하기를, “거란(契丹)은 본래 역적의 토벌을 명분으로 삼았고 지금 이미 강조를 체포하였으니, 만일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군대를 철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점을 쳐서 길한 괘(卦)를 얻었으므로 마침내 하공진과 고영기(高英起)에게 표문을 가지고 거란 진영으로 가도록 하였다. 하공진이 창화현(昌化縣)에 가서 표문을 낭장(郞將) 장민(張旻)·별장(別將) 정열(丁悅)에게 주니, 〈그들이〉 앞서 거란 군영에 가서 말하기를, “국왕께서는 진실로 와서 뵙기를 원하셨으나, 다만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셨고, 또한 국내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강남(江南)으로 피난 가셨으므로 배신(陪臣) 하공진 등을 보내어 사유를 알리려 하였습니다. 하공진 등도 역시 두려워하여 감히 앞에 나오지 못하오니, 청하옵건대 속히 군사를 거두어 주소서.”라고 하였다. 장민 등이 미처 군영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거란의 선봉군이 이미 창화현까지 진군하였다. 하공진 등이 앞서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자 거란 측에서 묻기를, “국왕은 어디 계시냐?”라고 하니, 〈하공진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지금 강남(江南)으로 가고 계시는데, 계신 곳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또 〈거란에서〉 묻기를, “〈강남이〉 먼가? 가까운가?”라고 하니, 〈하공진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강남은 너무 멀어서 몇 만 리 인지 알 수 없다.”라고 하니, 추격하던 거란 군대가 돌아갔다.
이듬해에는 하공진이 고영기와 함께 거란 진영으로 가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간청하니, 거란 임금이 그것을 허락하였고, 하공진 등을 억류하기로 하였다. 하공진은 억류당했지만, 내심 환국을 도모하면서 겉으로는 충성과 근실함을 보였는데, 거란 임금이 은총과 대우를 심히 더하였다. 하공진이 고영기와 함께 은밀히 모의하고 〈거란 임금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이제 이미 망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저희들이 군사를 이끌고 점검하여 오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거란 임금이 허락하였다. 곧이어 〈고려〉 왕이 국도(國都)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거란 임금은〉 고영기를 중경(中京)에 살게 하고, 하공진을 연경(燕京)에 살게 한 후에 양가(良家)의 딸을 배필로 삼아 주었다.
하공진은 좋은 말을 많이 사서 고려로 가는 길[東路]에 차례로 배치해 두었는데, 어떤 자가 그 계획을 보고하였다. 거란 임금이 그를 국문하자 하공진은 상세히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저는 우리나라를 감히 배반할 수 없습니다.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란 임금이 의롭게 여기고 그를 풀어주면서 절개를 바꿔 충성을 다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하공진의 말투가 더욱 강경하고 불손해지니, 마침내 그를 죽이고 앞 다투어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
후에 왕이 교서를 내려서 공훈을 기록하였고, 그의 아들 하칙충(河則忠)에게는 녹봉과 자급을 올려주었다. 문종(文宗) 6년(1052)에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은 통화(統和) 28년(1010)에 거란군이 침입하자, 적을 대하며 몸을 돌보지 않았고, 세 치의 혀를 움직여서 능히 대군을 물리쳤으니, 공신각에 초상을 그릴만 하다.”라고 하고, 그 아들 하칙충을 5품직으로 뛰어 올려 임명하였다. 얼마 후 또 그의 공적을 기록하고,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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