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강조전 원문과 번역

 고려사 강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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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가 개경으로 돌아와 목종을 궐 밖으로 내보내다 hoi

康兆, 穆宗時, 累官中樞使右常侍, 出爲西北面都巡檢使. 穆宗寢疾, 知金致陽謀變, 遣皇甫兪義, 往迎顯宗. 又知殿中監李周楨附致陽, 權授西北面都巡檢副使, 卽日發遣, 仍徵兆入衛. 兆聞命, 行至洞州龍川驛. 內史主書魏從正·安北都護掌書記崔昌, 曾坐事被黜, 深怨朝廷, 常欲構亂. 二人俱謁兆, 紿言, “主上疾篤, 命在頃刻, 太后與致陽謀奪社稷. 以公在外, 手握重兵, 恐或不從, 矯命徵召. 足下當速還本道, 大擧義兵, 保國全身, 時不可失.” 兆深然之, 以爲王已薨, 朝廷悉被致陽詿誤, 便歸本營. 太后忌兆來, 遣內臣守岊嶺, 使遏行人. 兆父患之, 爲書納竹杖中, 令奴剃髮爲僧, 詭言妙香山僧, 報兆云, “王已賓天, 姦兇用事, 可擧兵來, 以靖國難”

奴晝夜急走, 至兆處, 氣竭而斃. 兆探得杖書, 愈信王薨, 遂與副使吏部侍郞李鉉雲等, 領甲卒五千, 至平州, 知王未薨, 兆喪氣, 垂頭良久. 諸將曰, “業已來矣, 不可止.” 兆曰, “然.” 遂決意廢立. 不知王已迎顯宗, 乃遣分司監察金應仁, 率兵往迎. 先奏王曰, “上疾彌留, 國本未定, 姦黨窺覦. 又偏信庾行簡等讒諛, 賞罰不明, 致此危亂. 今欲定分以係人心, 除惡以快衆憤, 已迎大良君. 詣闕, 恐聖情驚動, 請出御龍興歸法寺, 卽掃盪姦黨, 然後迎入.” 王曰, “已知所奏.” 是日, 應仁與兪義到神穴寺, 奉顯宗還.

강조가 유배 길에 나선 목종을 시해하다 hoi

翼日, 鉉雲率兵入迎秋門, 大譟, 穆宗驚懼, 執行簡送兆所. 給事中卓思政, 郞中河拱辰, 皆奔于兆. 兆至大初門, 據胡床, 崔沆出自省, 兆起揖. 沆曰, “古有如此事乎?” 兆不應. 於是, 兵士闌入, 穆宗知不免, 與太后仰天號泣, 率宮人小竪及蔡忠順·劉忠正等, 出御法王寺. 兆坐乾德殿御榻下, 軍士呼萬歲. 兆驚起跪曰, “嗣君未至, 是何聲耶?” 俄而兪義等奉顯宗而至, 遂卽位於延寵殿. 兆廢穆宗, 爲讓國公, 使閤門通事舍人傅巖等守之, 遣兵殺致陽父子及行簡等七人, 流其黨及太后親屬周禎等三十餘人于海島. 穆宗使沆, 請馬於兆, 送一匹, 又於人家, 取一匹. 穆宗及太后乘之, 出自宣仁門, 向忠州. 行至積城縣, 兆遣尙藥直長金光甫進毒, 穆宗不肯飮. 光甫謂隨從中禁安覇等曰, “兆言, ‘若不能進毒, 可令中禁軍士行大事, 報以自刃.’ 不爾, 吾與若等俱族矣.” 夜覇等弑之, 以自刎聞, 取門扇爲棺, 權厝于館. 兆使人以縣倉米作飯, 祭之. 顯宗以兆爲中臺使, 鉉雲爲副使, 尋授兆吏部尙書叅知政事.

강조가 거란의 침입을 막다가 포로가 되어 항복을 거부하다 hoi

元年五月, 契丹主以兆弑君, 欲發兵問罪. 王聞之, 以兆爲行營都統使, 鉉雲及兵部侍郞張延祐副之, 起居舍人郭元, 侍御史尹徵古, 都官員外郞盧戩爲判官, 右拾遺乘里仁, 西京掌書記崔冲並爲修製官. 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安紹光爲行營都兵馬使, 御史中丞盧頲副之, 兵部郞中金爵賢及皇甫兪義爲判官. 少府監崔賢敏爲左軍兵馬使, 少府少監崔輔成副之, 興威衛錄事高幹, 大樂丞金在鎔爲判官. 刑部侍郞李昉爲右軍兵馬使, 刑部郞中金丁夢副之, 內謁者柳莊爲判官. 禮賓卿朴忠淑爲中軍兵馬使, 禮賓少卿李良弼副之, 尙書都事高延慶·司宰注簿庾伯符爲判官. 刑部尙書崔士威爲統軍使, 戶部侍郞宋隣副之, 左司員外郞皇甫申試·兵部員外郞元穎爲判官. 率兵三十萬, 軍于通州, 以備之.

十一月, 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 號義軍天兵, 渡鴨綠江, 圍興化鎭. 兆引兵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 據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棊. 契丹先鋒耶律盆奴率詳穩耶律敵魯, 擊破三水砦. 鎭主告契丹兵至, 兆不信曰, “如口中之食, 少則不可宜, 使多入.” 再告曰, “契丹兵已多入.” 兆驚起曰, “信乎?” 恍惚, 若見穆宗立于其後, 叱之曰, “汝奴休矣. 天伐詎可逃耶?” 兆卽脫鍪牟, 長跪曰, “死罪, 死罪.” 言未訖, 契丹兵已至, 縛兆裹以氈載之而去, 鉉雲亦被執. 契丹主解兆縛, 問曰, “汝爲我臣乎?” 對曰, “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 對如初, 又剮而問, 對亦如初. 問鉉雲, 對曰 “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蹴鉉雲曰, “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강조가 개경으로 돌아와 목종을 궐 밖으로 내보내다 hoi

강조(康兆)는 목종(穆宗)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사 우상시(中樞使 右常侍)가 되어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로 나갔다. 목종이 병석에 있으면서 김치양(金致陽)이 변란을 도모함을 알고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보내어 현종(顯宗)을 맞이하러 가게 하였다. 또한 전중감(殿中監) 이주정(李周禎)이 김치양 일당임을 알고 임시로 〈그를〉 서북면 도순검부사(西北面都巡檢副使)에 제수하여 그날로 출발하게 한 후 이어서 강조를 불러 〈궁궐에 들어와〉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강조가 왕명을 듣고 출발하여 동주(洞州) 용천역(龍川驛)에 이르렀다. 내사주서(內史主書) 위종정(魏從正)과 안북도호(安北都護)의 장서기(掌書記) 최창(崔昌)은 일찍이 어떤 일에 연루되어 쫓겨나서 조정을 깊이 원망하였으며, 항상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두 사람은 함께 강조를 보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주상의 병이 위독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고, 태후와 김치양은 왕위를 찬탈할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공이 변방에 있으면서 많은 병력을 장악하고 있으니 혹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왕명을 사칭하여 〈공을〉 부른 것입니다. 공께서는 마땅히 빨리 서북면[本道]으로 돌아가 크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서 나라를 보호하고 일신을 보전하여야 할 것이니 때를 놓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강조는 〈그 말을〉 매우 그럴 듯하게 여겨 왕은 이미 죽었으며 조정은 완전히 김치양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생각하고는 곧장 본영(本營)으로 돌아갔다. 태후는 강조가 오는 것을 꺼려 내신(內臣)을 보내어 절령(岊嶺)을 지키면서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도록 했다. 강조의 부친은 〈강조가 본영으로 돌아간 것을〉 근심하여 나머지 글을 써서 대나무 지팡이 안에 넣고 노(奴)에게 머리카락을 잘라 중처럼 변장하고 묘향산(妙香山) 중이라고 속인 후 강조에게 “왕은 이미 죽고 간흉이 권세를 휘두르니 군사를 개경으로 이끌고 와 국난을 바로잡으라.”고 전갈하게 하였다.

노(奴)가 밤낮으로 급히 달려가 강조가 있는 곳에 이르렀으나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강조는 지팡이 안의 편지를 찾아내어 더더욱 왕의 죽음을 확신하고, 마침내 부사(副使)인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李鉉雲) 등과 함께 무장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평주(平州)에 이르렀으나 왕이 죽지 않았음을 알고 〈강조는〉 기세가 꺾여 머리를 숙이고 오랫동안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길, “일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가히 그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강조(康兆)가 말하기를, “그렇소.”라고 하고 드디어 왕을 폐위시킬 뜻을 굳혔다. 〈강조는〉 왕이 이미 현종(顯宗)을 맞이하여 온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이에 분사감찰(分司監察) 김응인(金應仁)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현종을〉 맞아오게 하였다. 먼저 왕에게 아뢰기를, “주상의 병환이 위중한데도 국가의 근본이 아직 정해지지 않으니 간악한 무리들이 왕위를 엿보고 있습니다. 또 유행간(庾行簡) 등의 참소와 아첨만을 그릇되게 믿고 상벌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위난(危亂)에 이른 것입니다. 이제 명분을 바로잡음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악인을 제거함으로써 백성들의 울분을 풀어 주고자 대량원군[大良君]을 후계자로 맞이하고자 합니다. 궁궐에 나아가면 성정이 놀라실까 두려우니, 청하건대 용흥사(龍興寺)와 귀법사(歸法寺)로 나가 계시면 곧 간사한 무리들을 소탕한 후에 다시 맞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뢴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 날 김응인과 황보유의(皇甫愈義)가 신혈사(神穴寺)에 가서 현종을 받들고 돌아왔다.

강조가 유배 길에 나선 목종을 시해하다 hoi

다음날 이현운(李鉉雲)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추문(迎秋門)으로 들어오면서 크게 소란을 피우니, 목종(穆宗)은 놀라고 두려워 유행간(庾行簡)을 체포하여 강조(康兆)의 처소로 보내었다. 급사중(給事中) 탁사정(卓思政)과 낭중(郞中) 하공진(河拱辰)은 모두 강조에게로 재빨리 붙었다. 강조가 대초문(大初門)에 이르러 호상(胡床)에 있다가 최항(崔沆)이 성(省)에서 나오자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최항이 말하기를, “옛적에도 이 같은 일이 있었는가?”라고 하니, 강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병사들이 〈궁궐로〉 난입하니 목종이 면하지 못함을 알고 태후와 함께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면서 궁인(宮人)·내수(內竪) 및 채충순(蔡忠順)·유충정(劉忠正) 등을 거느리고 법왕사(法王寺)로 나갔다. 강조가 건덕전(乾德殿)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았는데 군사들이 만세를 불렀다. 강조가 놀라 일어나 무릎 꿇어앉으며 말하기를, “다음 임금이 아직 오시지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이 현종(顯宗)을 받들고 도착하니 마침내 연총전(延寵殿)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켜 양국공(讓國公)으로 삼고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부암(傅巖) 등을 시켜 지키도록 하였으며, 군사를 보내어 김치양(金致陽) 부자 및 유행간 등 일곱 명을 처형하고 그 일당 및 태후의 친속 이주정(李周禎) 등 30여 명을 바다섬으로 유배 보내었다. 목종은 최항으로 하여금 강조에게 말을 청하게 하니 한 필을 보내어왔고 또한 민가에서 한 필을 얻었다. 목종과 태후가 그 말을 타고 선인문(宣仁門)을 나와 충주(忠州)로 향하였다. 일행이 적성현(積城縣)에 이르렀을 때, 강조가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를 보내어 독약을 올렸으나 목종이 마시기를 거부하였다. 김광보가 왕을 호위하는 중금(中禁) 안패(安覇) 등에게 말하기를, “강조가 말하기를, ‘만약 독약을 드시게 할 수 없다면 중금 군사로 하여금 대사를 행하고 자결하였다고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와 너희들은 모두 멸족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밤이 되자 안패 등이 목종을 시해한 뒤 자결하였다고 보고한 후 문짝을 얻어 관을 만들어 임시로 관아에 빈소를 차렸다. 강조는 사람을 시켜 적성현 창고의 쌀로 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현종이 강조를 중대사(中臺使)로, 이현운을 부사(副使)로 삼았고 얼마 후에 강조에게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參知政事)를 제수하였다.

강조가 거란의 침입을 막다가 포로가 되어 항복을 거부하다 hoi

〈현종(顯宗)〉 원년(1010) 5월, 거란(契丹) 임금이 강조(康兆)가 임금을 시해한 것을 빌미로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고자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이현운(李鉉雲)과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를 그 부사(副使)로, 기거사인(起居舍人) 곽원(郭元)과 시어사(侍御史) 윤징고(尹徵古)와 도관 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을 판관(判官)으로, 우습유(右拾遺) 승이인(乘里仁)과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 최충(崔冲)을 아울러 수제관(修製官)으로 삼았다. 검교상서우복야 상장군(檢校尙書右僕射 上將軍)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어사중승(御史中丞) 노정(盧頲)을 그 부사(副使)로, 병부낭중(兵部郎中) 김작현(金爵賢)과 황보유의(皇甫兪義)를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소부감(小府監)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소부소감(少府少監) 최보성(崔輔成)을 그 부사(副使)로, 흥위위녹사(興威衛錄事) 고간(高幹)과 대악승(大樂丞) 김재용(金在鎔)을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형부시랑(刑部侍郞) 이방(李昉)을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형부낭중(刑部郞中) 김정몽(金丁夢)을 그 부사(副使)로, 내알자(內謁者) 유장(柳莊)을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예빈경(禮賓卿) 박충숙(朴忠淑)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예빈소경(禮賓少卿) 이양필(李良弼)을 그 부사(副使)로, 상서도사(尙書都事) 고연경(高延慶)과 사재주부(司宰注簿) 유백부(庾伯符)를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호부시랑(戶部侍郞) 송린(宋隣)을 그 부사(副使)로,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황보신시(皇甫申試)와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원영(元穎)을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통주(通州)로 가서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1월, 거란 임금이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을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이름하여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강조(康兆)는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군영을 두고 삼수(三水)의 합류점에 웅거하였으며 강조는 그 가운데에 머물렀다. 한 부대는 통주 근교의 산에 군영을 세우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 부근에 군영을 두었다. 강조가 검차(劒車)를 일렬로 배치하여 두고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곧 검차로 함께 공격하니, 모조리 물리치지 않음이 없었다. 거란군이 여러차례 물러나니, 강조는 마침내 적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 사람들과 바둑을 두었다. 거란의 선봉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삼수의 보루를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군이 쳐들어오고 있음을 알렸으나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오게 하라.”라고 하였다. 다시 보고하기를, “거란군이 이미 대거 침입하였다.”라고 하니, 강조가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라고 하며 당황하여 마치 목종(穆宗)이 그 뒤에 서서 질책하며 “네 놈은 끝났다. 천벌이 강조를 멀리하겠는가?”라고 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강조는 투구를 벗고 꿇어 엎드린 채 거듭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이 아직 끝나기도 않았는데, 거란군이 이미 들어와 강조를 결박한 후 담요로 싸서 운반해 갔고 이현운(李鉉雲)도 사로잡혔다. 거란 임금이 강조의 결박을 풀어 주며 묻기를, “너는 내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니 강조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이 처음과 같았으며 또한 칼로 살을 발라내며 물어도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이현운에게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두 눈은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습니다. 일심으로 섬길 뿐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조가 노하여 이현운을 발로 차며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으로 어찌 이와 같이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거란은 마침내 강조를 처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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